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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철학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의 인간 고통의 문제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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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수많은 종파 중에서 소승 불교와 대승 불교의 개념을 살펴보고, 인간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불교가 선택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또한 기독교와 불교의 인간 고통 해결 방안의 차이점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우리는 어떤 종교가 참된 종교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소승 불교

불타(Buddha)의 사후 불교는 급속히 퍼져나갔다. 처음 3세기가 지나자 불교 신앙은 16개 이상의 다른 종파로 나뉘었다. BC 250년경에 아소카(Asoka)라는 인도의 왕은 불교 선교사를 시리아, 이집트까지 보내서 불교를 널리 전파하였다. 남부 아시아 속하는 버마, 태국, 캄보디아 등의 불교는 히나야나(Hinayana)라고 불리는 소승(Lesser Vehicle) 불교이다. 이 형식의 불교는 불타 고오타마의 원래 가르침과 가장 밀접하다. 불타는 열반에 들어갔고 더 이상 인간적인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모든 생성과 존재 너머에 존재한다. 이 남부 아시아의 불교는 불타의 가르침대로 철저한 자기 훈련과 자기 수양을 통한 구원을 강조한다. 그것도 역시 불타의 유적에 대한 숭배와 같은 몇 가지 종교적인 면들을 취하게 되었다. 소승 불교의 사원들에는 거대한 불상이 있다. 이론에 의하면 이것들은 단순히 형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실제적인 관습에서는 우상들이며, 보통의 불교신자들은 그것들에게 예배한다. 보통 사람들은 이러한 형상들 앞에 드려진 기도들이 응답될 것이라고 믿는다.

대승 불교

불교의 또 다른 큰 형태는 마하야나(Mahayana) 불교이다. 이것은 대승(Greater Vehicle)을 의미한다. 이 대승 불교는 그리스도 때에 시작되었다. 불교의 이 새로운 형태에서는 심리학적 자기 수양이 더 이상 주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하게 종교적인 이상들과 형상들로 대치되었다. 불타 고오타마 자신이 신으로 섬겨졌다. 그리고 그가 고통받는 인간을 돕기 위해 땅에 왔다고 주장되었다. 많은 신비들이 불타의 인격을 중심으로 생겨났다. 고오타마는 유일한 불타가 아니며, 나머지가 하늘에 남아있는 동안에 이 땅에 내려온 불타의 일부인 많은 불타 중의 하나라고 알려졌다. 구원은 더 이상 완전히 자기 수양의 문제로 간주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베풀 공덕을 무한히 비축한 신적 존재들이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대승 불교는 북부 아시아에서 상당히 대중화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은 중국, 한국, 일본에서 성장했고 번성했다. 그것은 굉장히 많은 수의 신적 존재들을 섬기는 불교의 가장 우상적인 형태를 띄웠다. 인간을 위한 신적 구원자들이 모든 계층들에 있다고 전해진다. 우주의 중심부는 불타(Buddha) 그 자체가 존재하며, 불타(Buddha)의 후광으로서 자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 불타의 특성은 모든 사람 속에 있고 양성되고 개발될 수도 있다.

인간 고통의 문제 해결

어떤 기독교 학자는 불교를 "극동의 가냘픈 의지"라고 불렀다.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 불교는 놀랍게도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 대하여 강한 지배력을 획득하고 있다. 우리는 불교의 그러한 성공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그것은 아마 불교가 아주 현실적이고 우주적인 인간의 고통이나 슬픔의 문제에 전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함으로써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불교는 확실히 고민하는 심령과 마음에 일종의 평화와 안정을 준다. 유럽이나 미국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은 아시아의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고뇌를 이해할 수 없다. 불교의 힘은 끝없는 불행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그럴듯한 약속이 있다. 그러나 슬프게도 그것은 거짓된 약속이며, 결국 마지막에는 환상에서 깨어날 뿐이다. 불교는 아주 많은 매력적인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거짓된 종교이다. 무엇보다도 불교는 잘못된 문제에 대해 관심을 쏟고 있다. 불교는 죄나 악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문제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죄로부터의 구원을 주된 복음으로 삼고 있지만, 불교는 고통으로부터의 구출을 설파한다. 과연, 인간에게는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가 될까? 고통의 원인이 되는 죄가 문제인가? 아니면 그 죄로부터 발생되는 고통의 문제인가? 우리는 상식적으로 쉽게 알 수 있다. 원인을 제거해야 그 결과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죄악이라는 원초적 원인 제거를 통한 인간의 구원을 말한다. 하지만 불교는 인간의 죄악으로 발생된 고통이라는 결과를 해결하기 위해 현세적인 방법만을 추구하고 있다. 생각해 보라. 과연 무엇이 진정한 해결책이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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