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로아스터교는 유대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기독교의 기본적 교리의 근간이 조로아스터교의 교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조로아스터가 죽은 뒤 그 종교적 기반은 흔들렸고 마침내 급속한 몰락의 길을 가게 된다.
조로아스터교의 기독교에 미친 영향
조로아스터교의 ‘선과 악,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 등 이분법 교리는 유대교보다는 이후의 ‘나사렛 사람들’, 곧 서기 90년 유대교에서 쫓겨난 초기기독교 교리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당시 초기기독교인들은 세상이 곧 망할 것이라는 말세론에 무게를 두고 있어 말세 이후의 세상에 관심이 많았다. 천국과 지옥 등의 내세관이 강하게 유입된 이유의 하나였다. 조로아스터교는 아후라 마즈다에 대한 ‘믿음’이 신앙의 기본이었다. 반면에 유대교는 믿음보다 율법을 지키는 선한 행실, 곧 율법의 ‘실천’을 강조했다. 나중에 ‘구원이 믿음에서 오는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꽹과리인가?’라는 바울과 유대분파의 논쟁을 살펴보면 바울은 조로아스터교의 전통인 ‘믿음’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로아스터의 출생 역시 예수와 비슷하다. 조로아스터의 어머니는 몸속에 빛이 들어와 15년간 머무는 동안 결혼을 하고 조로아스터를 낳았다. 훗날 조로아스터는 처녀가 잉태하여 샤오샨트라는 구세주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러한 메시아신앙이 유대인들에게는 그들을 압제 속에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 메시아로 바뀌었다. 조로아스터 사후에 조로아스터교는 마기(제사장)에 의해 삼위일체설이 등장하는 등 많은 변질을 겪는다. 마기들은 성부 아후라 마즈다, 성자 미트라, 성령 천사장(스펜타 마이뉴)의 삼위일체를 내세웠다. 특히 성자로서의 미트라 숭배 사상은 초기기독교와 공존하면서 성자 예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유대교에서는 각 종파마다 교리에 대한 해석과 주장이 달라 통일된 교리가 그리 많지 않았다. 오히려 초기기독교도들이 조로아스터교의 이분법 개념을 그대로 도입했고, 그 뒤 이슬람교도 유대교와 기독교를 통해 이런 개념을 무리 없이 받아들였다. 세상은 악한 영과 선한 영의 투쟁이라고 갈파한 조로아스터교의 이분법적 종교관이 훗날 이들 서양종교에서 배타적 종교문화로 왜곡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교조주의(원리주의, 근본주의)이다. 전승에 의하면, 조로아스터가 광야로 가서 기도할 때 악령이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세상권세를 다 주겠다고 했지만 조로아스터는 거부한다. 예수가 사탄에게 시험당하는 대목과 유사하다. 30세 무렵에 신의 계시를 받아 새 종교를 전파했다는 부분도 예수와 비슷하다. 조로아스터교 신자들은 처녀가 잉태하여 샤오샨트라는 구세주가 올 것을 믿는다. 또 마지막 날에 심판의 책에 기록된 대로,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이며 지상천국에 다시 부활할 것을 믿는다. 또 영혼이 육체를 떠나기 전 3일 동안 지상에 머무르면서 살아생전의 일들을 반추한다는 조로아스터교의 믿음은 미트라와 예수 등 구세주들의 3일 후 부활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예수 탄생 시 경배하러 왔던 동박박사(마기)들은 조로아스터교 제사장이라고 한다. ‘조로아스터의 예언대로 지혜의 사람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동쪽에서 예루살렘에 와 아기를 숭배하고 선물을 바쳤다.
조로아스터교의 변형
조로아스터가 죽은 뒤 그의 종교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남쪽으로 서서히 전파되었고, 서쪽으로는 메다이와 페르시아 영토로 전파되었다. 이렇게 전파되는 동안 조로아스터교는 다신교를 숭배하던 고대종교와 혼합되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관이 흔들리면서, 이단종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고대 페르시아 신들이 들어와 아후라 마즈다의 힘을 나누어 가졌다. 일례로 미트라가 대중적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심지어 아후라 마즈다, 미트라, 아나히타 여신을 삼위일체로 여기는 이단이 퍼져나가더니 결국 미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주요 교리를 흡수해 독자종교가 되었다. 윤리적 도덕을 중요하게 여겼던 조로아스터의 사상은, 후기에 이르러 청정제의를 중요하게 추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조로아스터가 거부했던 하오마즙으로 만든 술을 바쳐 악령을 쫓고 과거의 주술도 다시 사용했다. 악령퇴치를 위한 강력한 진언(만트라)을 사용했으며, ‘그 뜻을 이해하든 못하든 간에 정확하게 외우기만 하면 신통력이 발휘된다’라고 믿었다. 실크로드 주도권을 놓고 동로마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대립하던 당시 무함마드가 일으킨 새로운 세력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결국 사산왕조마저 붕괴되어 이슬람교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면서 조로아스터교는 급속히 몰락한다. 아랍 정복자들은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많은 신자가 인도로 이주했고 이들을 ‘파르시(페르시아인)’라고 불렀다. 현재 이란 남부에는 소수의 조로아스터교 교인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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