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는 신이 아니다. 불교는 종교가 아닌 자기 계발의 종교이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은 종교로 숭배되었고, 그 종교는 세상에 전파되어 온 인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인간의 종교는 일종의 사상이며, 그 사상이 종교가 되기도 한다.
신이 아닌 부처
부처(석가)를 불교의 신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부처는 신보다 격이 높은 ‘붓다’이다. 붓다(buddha)는 산스크리트어로 ‘깨닫다’를 뜻하는 동사 ‘부드흐(budh)’의 과거분사형으로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의미다. 즉 붓다는 이름이 아닌 존칭이다. 부처의 본명은 고타마 싯다르타이다. 부처를 석가라고 하는 이유는 중국에서 ‘샤카족의 성자’를 ‘석가모니’라고 표현했기 때문이다. 부처의 생몰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기원전 563년~기원전 483년이라는 설과 기원전 463년~기원전 363년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불교에서는 이 세상에서 ‘깨달음을 얻은 자’는 고타마 싯다르타뿐이며 ‘석가 앞에 붓다 없고, 석가 뒤에 붓다 없다’, 즉 부처만이 ‘붓다’라고 말한다. 중국에서는 부처를 소리 나는 대로 적어 불타(佛陀)라 표현했고 부도(浮屠)라 쓰기도 했다. ‘붓다’는 브라만교의 최고신 브라흐마(범천) 이외에 여러 신을 하위에 둔다. 불교에서는 우주의 근본적 실재인 브라만조차도 진리를 관장하는 부처 밑에 있는 것이다. ‘붓다’에는 3가지 형태가 있다. 여래, 보살, 명왕까지가 ‘붓다’이며 여기에 부처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다. 여래는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후의 모습이며 검소하게 옷만 입고 있다. 여래란 ‘진여(진리)로부터 온 사람’이라는 뜻이다. 보살은 부처가 왕자의 신분으로 수행 중인 모습이며 보통 왕자의 관, 목걸이, 귀걸이 등의 장신구를 착용하고 있다. 보살은 ‘보리살타’의 줄임말로 ‘보리’는 불의 깨달음, ‘살타’는 구하는 사람(수행자)이라는 뜻이다. ‘명왕’은 부처가 인간을 구제하고 악에서 보호하기 위해 모습을 바꾸어 분노하며 싸우는 모습이다. 천부는 브라만교의 신을 비롯해 고대 인도인이 신봉한 신들이다.
종교가 아닌 불교
불교의 시조 부처는 브라만교의 권위와 의식, 카스트제도를 부정했다. 부처는 의례나 신분에 얽매이지 않는, 자기 해방을 지향하라고 설파했다. 인도 고대 사회가 큰 발전을 이루면서 민중은 브라만교가 규정한 기존의 의식주의와 고정 신분제에 많은 의문을 품게 되었다. 부처는 그들에게 자기 해방을 지향하는 새로운 사고의 틀을 제시했다. 부처는 초월적인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자신을 신격화하지도 않았다. 절대적인 신을 두게 되면 그 신을 모시는 의식주의가 횡행하고 이를 진행할 신관이 요구되어 신분이 생긴다. 브라만교의 폐해를 비판한 부처가 절대적인 신을 부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신의 개입 없이 순수하게 인간의 삶과 마음가짐에 대해 설파했다는 측면에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요즘의 자기 계발과 비슷하다. 그러나 부처가 죽자 그 역시 절대적인 신처럼 취급되었다. 앞에 언급했듯이 부처는 브라만교의 최고신 브라흐만도 추앙하는 초월적 존재였다. 따라서 불교 원리는 부처에게 세계의 근원을 귀결시킨다는 의미에서 일신교적 성격을 띤다고 볼 수 있다.
종교 전파
부처의 죽음 이후 불교는 여러 유파로 분열되었다. 그중에서 주요 유파는 상좌부불교와 대승불교였다. ‘상좌부’란 계율을 엄수하는 보수파 지도층을 말한다. 상좌부불교가 보수적이고 귀족적이라면, 널리 대중을 구제하려고 한 것이 대승불교이다. 불교 구제를 위해 ‘커다란 수레’ 역할을 했다 하여 이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대승불교는 상좌부불교에 ‘소승불교’라는 멸칭을 사용했다. 불교는 인도를 넘어 해외에 전파되었다. 기원전 3세기, 인도에서 마우리아 왕조 전성시대를 이끈 아소카왕은 스리랑카에 왕자를 파견해 불교를 포교하도록 했다. 미얀마에도 승려들을 파견하여 포교를 지시했다. 이후 상좌부불교는 미얀마, 태국 등 인도차이나반도 북서부의 주류 종교가 되어 동남아시아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대승불교는 2세기경 인도 북쪽, 당시의 고속도로였던 실크로드를 타고 후한에 전파되었고, 다시 한반도를 거쳐 6세기에 일본에 전파되었다.
한편 인도차이나반도에는 상좌부불교 외에 힌두교가 전파되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교류는 1세기 말에 시작되었다. 당시 남인도에는 캄보디아와 베트남 남부로 이어지는 해상 루트가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 루트가 베트남에서 중국으로 뻗어 있었다. 중국 사서 후한서를 보면 166년에 대진왕 안돈의 사신이 베트남의 일남군(현재의 베트남 중부)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안돈’은 로마 오현제 중 한 명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라는 설이 있다(다양한 설이 있음). 그의 사신이 이 해상 루트로 왔다. 4세기, 인도 굽타 왕조 시대에 인도 고전 문화가 전성기를 맞이한다. 인도 상인들이 동남아시아와 활발한 교역을 맺어 힌두교 문화가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인도의 힌두교는 해상 루트로 직접 연결된 베트남 남부, 캄보디아 등의 인도차이나 남동부로 확산되었다. 캄보디아의 크메르 문자는 인도 문자를 바탕으로 만든 것으로, 이 시대에 정착되었다. 태국 문자는 이러한 크메르 문자에서 파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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